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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외진출 성공수기

해외진출 성공스토리를 한눈에!

여전히 ‘현재진행형’인 나의 창업 성공스토리

작성자
K-Move관리자
조회수
5,172

K-Move 성공수기집 우수상 / 해외창업

 

 

여전히 ‘현재진행형’인 나의 창업 성공스토리

 

박정연 [캄보디아 / 메론국제기획]

 

 

 

내가 10여 년째 정착해서 살고 있는 나라는 ‘앙코르와트’로 유명한 캄보디아다. 나는 현재 국제행사기획사를 운영하고 있다. 한국에서 ‘은행’이라는 비교적 안정된 직장을 그만 두고 이 나라에 뿌리를 내리기까지 그동안 우여곡절도 참 많았다.

처음 시작한 사업은 여행업이었다. 경험은 일천했지만, 관광대학원을 졸업했고 대학선배가 경영하는 여행사에서도 잠시 일해 본 경험이 있었기에 내 나름대로 자신감으로 가득 차 있었다. 처음 정착한 ‘씨엠립’이란 곳은 앙코르와트 유적이 있는 작은 관광도시였다. 그 당시만 해도 캄보디아는 동남아 다른 나라에 비해 그다지 알려지지 않았지만, 세계 7대 불가사의 중 하나인 앙코르와트의 명성이 차츰 알려지면서 외국관광객들이 몰려들기 시작했다. 많게는 연간 30여 만 명의 한국관광객이 찾아 들기 시작했고, 그 덕분에 출발은 매우 순조로운 편이었다. 성수기엔 한국 직장에서 받던 월급의 두세 배 이상을 벌었다. 진작 직장을 그만두지 않았던 게 후회될 정도였다.

그러나 여행시장의 ’호황‘이라는 게 그리 오래 가지 못했다. 동남아에 쓰나미가 덮치면서 제일 먼저 여행업이 타격을 받았다. 편도 비행기값에도 못 미치는 19만 9천 원짜리 덤핑상품이 판을 치기 시작했고, 여행사끼리 과당경쟁이 벌어졌다. 견디지 못한 여행사들은 하나 둘씩 문을 닫거나 아예 한국으로 철수해버렸다. 나 역시 더 이상 버텨낼 재간이 없었다. 한국으로 다시 돌아갈까 심각하게 고민을 했지만, 이대로는 물러설 수는 없었다. 고심 끝에 무작정 수도인 프놈펜으로 이사를 결심했다.

 

벼랑 끝에서 틈새시장을 찾다

프놈펜은 인구 2백만 명이 사는 캄보디아의 수도인 만큼 상황이 더 나빠지지는 않을 것이란 기대감이 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시장을 제대로 읽지 못한 나의 엄청난 실수이자 착각이었다. 얼마 지나 않아 더 큰 시련이 찾아왔다.

프놈펜을 오가는 해외 비즈니스 유동인구는 꽤 많았지만, 정작 순수 관광객들은 드물었다. 가뭄에 콩 나듯 들어오는 문의도 하루나 반나절짜리 시내관광이 고작이었다. 시내 변두리에 마련한 8평 남짓한 사무실 임대료조차 버거울 정도로 재정 상태는 최악이었다. 경제적 압박 때문에 불면의 밤이 이어졌고, 간신히 눈을 붙인 새벽녘마다 황톳빛 메콩강 물속에서 허우적대는 꿈을 꾸다 깨어나기 일쑤였다.

그러던 어느 날 내 인생의 새로운 전환점이 된 전화 한통이 걸려왔다. 프놈펜 모 특급호텔에서 열릴 예정인 국제 컨퍼런스 행사를 대행해줄 수 있냐는 의뢰였다. 한 번도 국제행사는 대행해본 적이 없었지만, 사무실 보증금까지 날린 상태에서 찬밥 더운밥 가릴 처지가 아니었다. 무턱대고 “자신 있다”는 대답부터 했다. 그렇게 허세라도 부릴 수밖에 없는 절박한 상황이었다.

나의 첫 고객은 국내에서도 꽤 이름이 알려진 전기 관련 중견기업이었다. 기업매칭서비스를 포함한 행사 전반 프로그램을 나에게 전적으로 맡겼다. 전문기획사들도 많을 텐데, 굳이 작은 여행사에 그런 큰 행사를 맡겼다는 사실이 처음엔 나로서도 의아했다. 궁금증은 나중에 행사책임자의 말을 통해 풀렸다. 행사를 맡길 만한 전문기획사를 찾을 수 없었다는 솔직한 고백이었다. 순간, 머릿속을 스쳐가는 무언가가 있었다. 곰곰이 생각해 보니, 현지에서 국제행사를 대행하는 한국계 전문회사를 본 적이 없는 것 같았다.

다음날부터 코트라 지사무소에 문의를 해보고, 교민지 광고도 뒤져보았지만, 예상했던 대로 단 한 군데도 없었다. 도전해볼 만한 ‘틈새시장’이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시장상황 역시 괜찮은 편이었다. 부동산 건설붐이 한창 일기 시작하면서 캄보디아로 진출을 준비하는 대기업들도 상당수 있었고 때마침, 진출 기업들의 크고 작은 사업설명회 같은 홍보행사나 전시박람회도 덩달아 늘어나는 추세였다. 당시에도 현지인들이 운영하는 대행업체가 여럿 있었지만, 한국고객들의 까다로운 요구조건을 받아 줄 수 있는 수준은 아니었다.

행사를 맡게 되자마자, 곧바로 행사 관련 주요 콘셉트와 목적 등을 분석한 후, 그동안의 노하우를 총동원했다. VIP를 위한 초청장 DM발송부터 행사 관련 자료를 영문과 크메르어로 번역하는 일은 물론이고, 연설문 초안 작성과 언론용 보도자료 준비에 이르기까지 고객기업이 챙겨할 고유영역 업무마저도 일일이 감수하고 조언을 해주었다. 모처럼 일거리가 생긴 직원들도 신바람이 나서 밤을 새워가며 열심히 거들어주었다. VIP의 동선과 연설 시간을 체크하고, 수차례의 리허설을 마친 후에야 비로소 준비를 마칠 수 있었다.

물론 행사를 준비하는 과정에서 시행착오나 어려움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무엇보다 현지 사정을 잘 모르는 고객을 이해시키거나 설득하는 일이 쉽지 않았다. 한국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행사용 흰 장갑조차 현지에선 구하기 힘들다는 현실을 고객들은 도무지 이해하지 못했다. 낡은 음향시설과 조명, 조잡한 무대 인테리어도 한국 수준을 요구하는 고객의 눈높이를 맞추기 힘들었다. 그래도 안 된다는 말은 절대로 입 밖에 내지 않았다. “이가 없으면 잇몸으로도 한다”는 생각으로 고객의 요구를 수용하기 위해 최대한 노력을 다했다. 차츰 시간이 지나자, 행사책임자도 어느 정도 수긍을 하는 눈치였다. 현지에서 구하기 힘든 행사 물품은 EMS를 통해 한국에서 배송 받기도 하고 행사용 불꽃을 구하러 장대비까지 맞으며 중국 재래시장을 들쑤시고 다녔다. 축하공연을 맡을 압사라 공연팀이 마땅치 않아 국립예술대학 부총장까지 만나 설득한 끝에 간신히 섭외에 성공하기도 했다.

 

나만의 비즈니스 노하우를 축적하라

3박 4일간 프놈펜에서 열린 첫 행사는 두 달 동안이나 혼신을 다해 준비하고 고생한 덕분에 성공적으로 마무리될 수 있었다. 행사기간 내내 불안한 마음으로 지켜보던 행사책임자도 매우 흡족해하는 눈치였다. VIP의 공항 환송행사까지 마무리되자, 긴장이 풀렸는지 다리가 후들거려 더 이상 서있을 수조차 없을 정도였다. 엄청난 수익을 남긴 행사는 아니었지만, 당시 나와 우리 가족, 그리고 직원들의 생계는 물론이고 미래의 운명을 바꾼, 매우 의미 깊은 행사였다. 첫 행사를 마치고 수지타산을 맞춰보니 당초 예상했던 것보다 20% 이상 적었지만 밀린 사무실 임대료는 물론이고 직원들에게도 보너스를 챙겨줄 수 있었다.

한 달 후 예전에 일을 그만 두었던 직원들까지 다시 불러들였다. 직원 6명으로 새롭게 사무실을 열고 전열을 가다듬었다. ‘메론국제기획’이란 간판을 내걸고, 평소 친하게 지내던 투자자와 동업방식으로 국제행사대행업을 본격 시작했다. 기대했던 것만큼 초기 반응이 썩 좋지는 않았지만, 초조한 마음은 들지 않고 오히려 마음이 느긋해졌다. 당장의 조급함이 사라지니, 객관적으로 시장을 보는 안목이 생겼다. 이 분야에 대한 공부가 더 필요하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틈나는 대로 국제행사나 각종 박람회가 열리는 컨벤션센터를 찾아가 행사진행 상황을 눈여겨보고 점검했다. 심지어는 초대받지도 못한, 일면식도 없는 현지인 부자들의 결혼식장에도 불쑥 찾아가 꽃장식 등 무대 인테리어를 둘러보거나 음식 맛을 보기도 했다. 괜찮은 현지 이벤트회사 담당자를 만나면 반드시 함께 식사하며, 정보교류에도 힘썼다.

하지만 “국제행사기획이란 게 이런 것이구나!”라고 깨닫게 된 것은 그 후로도 무려 3년이나 지난 후였다. 비록 비싼 수업료를 지불했지만, 그 대신 그 시간 동안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나만의 소중한 비즈니스 노하우를 축적할 수 있었다. 조금씩 크고 작은 행사 관련 문의전화가 걸려오기 시작했다. 일거리가 늘기 시작했고, 회사 직원수도 그 사이 8명으로 다시 늘었다. 그동안 프놈펜에서 개최된 17회 세계한상인대회를 비롯해 한국관광공사의 의료관광홍보행사라든지 대한상공회의소의 기업매칭 상담투자컨퍼런스와 시스타, 타히티 같은 한류 팝스타의 현지 공연 같은 굵직한 국제행사를 대행했고, 현지방송국과도 제휴해 대부분 성공적으로 행사를 마무리했다.

작년부터는 맞춤형 행사기획안을 미리 만들어 거래처가 될 만한 기업들을 찾아가기 시작했다. ‘인터넷시대’라고 하지만, 이메일을 통한 홍보물 발송만으로는 역시 한계가 있음을 뒤늦게 깨달았기 때문이다. 현지화 전략을 시도해 입소문을 타고 외국 고객들도 꾸준히 늘기 시작했다. 지금은 주 고객의 40% 이상이 캄보디아에 진출한 외국계 상사나 은행들이다. 현재 크고 작은 오픈식 이벤트 행사나 전시박람회, 아파트 분양 홍보 행사, 가수들의 축하공연까지 이벤트업도 대행하고 있다.

이제는 그동안의 시행착오와 실패를 발판으로 어느 정도 안정적인 궤도에 올랐다는 느낌이 든다. 하지만, 내가 그동안 거둔 작은 성공은 ‘창업성공 스토리’라는 거창한 타이틀을 붙이기엔 아직 글로 옮기기조차 쑥스러운 수준이다. 그래도 첫 창업 실패 후 겨우 몇 천 달러에 사무실 임대 보증금과 컴퓨터, 집기류가 전부인 상태에서 시작해 성공했기에 그 성취감은 이루 말할 수 없다. 그 사이 월세집도 벗어나 번듯한 내 집도 마련했다. 힘든 가운데도 참고 의지가 되어준 아내에게는 한없이 고마우면서도 미안한 마음이 든다.

 

해외창업의 원칙, 스스로 현지인이 되라

다들 스펙을 요구하는 취업보다 창업이 더 쉬울 거란 편견을 갖고 있다. 나 역시 처음엔 그런 생각을 갖고 있었다. 하지만 창업은 시작과 동시에 앞으로 닥치게 될 모든 결정사항에 대해서 항상 책임이 뒤따르기 때문에 더 힘들고 외롭다. 언어도 문화 환경도 다른 외국에서 위로해주거나 조언해줄 친구조차 없고, 더욱이 현지의 텃세와 차별도 딛고 일어서야 한다는 고충도 있다.

솔직히, 해외에서 창업에 성공하기란 모래사막 한가운데서 장미꽃을 피우는 것만큼이나 힘들다. 그동안 주변에서 성공보다 실패한 경우를 더 많이 보아왔다. 물론 실패 원인은 다양하겠지만, 대부분 현지문화에 대한 몰이해와 후진국이라고 사장을 너무 쉽게 본 경우들이다. 우리 시각으로는 느리고 뭔가 부족하다고 판단할 수 있지만, 그런 가운데도 나라마다 그 사회의 근간을 이끌어가는 보이지 않는 큰 흐름과 패턴이 있다. 그것을 읽어내지 못하면 해외창업을 성공으로 이끌기 쉽지 않다. 결코 그들을 얕보거나 무시해서도 안 된다.

내가 나름대로 창업에 성공하기까지는 현지인 친구들의 도움이 절대적으로 컸다. 어려운 시기에 내 곁을 떠나지 않고, 나의 성공을 도와준 내 가족 같은 현지인 직원들의 희생 역시 간과할 수 없다. 단언컨대, 현지인들 위로 군림하거나 우월하다고 생각하는 순간, 해외에서의 성공확률은 절반 이하로 떨어진다고 말하고 싶다.

지금은 웃으며 이야기할 수 있지만, 첫 창업 실패로 빈털터리가 된 후 자살충동을 느낄 만큼 큰 좌절도 맛보았다. 하지만 내가 다시 일어설 수 있었던 것은 희망의 끝자락을 놓지 않고 끝까지 버티며, 현지시장을 분석하고 틈새시장을 공략하려 했던 노력 때문이 아닌가 싶다. 현지화 전략도 어느 정도 주효했다는 생각이다. 교민을 상대로 한 사업은 시작하기는 쉽지만, 장기적인 관점에선 시장규모도 작고 성장에 한계가 있기 마련이다.

지금까지 걷어 들인 작은 성공에 안주하기엔 아직 이르다. 앞으로 가야할 길도 멀고 험난하다. 방심하는 순간 위기는 어김없이 찾아오기 때문이다. 그래서 늘 초심을 잃으려 노력하고 있다. 나처럼 취업을 하기엔 좀 늦은 나이에 해외창업을 꿈꾸거나 준비하는 분들이 계시다면, 보잘 것 없는 이야기지만 작은 도움이라도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Profile

박정연은 한국에서 은행을 그만둔 뒤 캄보디아에서 여행사를 경영하다 실패한 경험이 있다. 현재는 국제행사 대행사인 메론국제기획을 운영하고 있다. 그가 재기에 성공할 수 있었던 가장 큰 원동력은 캄보디아 현지시장을 체계적으로 분석해 기존에 없던 새로운 수요를 찾아낸 것이다. 해외창업을 위해서는 현지문화를 존중하는 자세가 중요하다고 조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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