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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외진출 성공수기

해외진출 성공스토리를 한눈에!

세상에 중심에 나를 세우다.

작성자
관리자
조회수
6,930

세상에 중심에 나를 세우다. “

 

 

호주, 그리고 브리즈번. 2010 3월 까지만 해도 나는 호주라는 나라의 이름 정도만 알고 있는 상태였다. ‘호주하면 시드니. 오페라하우스. 이렇게 핵심적인 단어만 알고 있는 정도랄까.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지구반대편에 있는 그 멀디 먼 나라로 떠나기로 왜 마음을 먹었는지 잠시 회상해보자면 호주를 오기 전 나는 비서라는 직업으로 2년 동안 삼성전자에서 계약직 사원으로 근무하고 있었고, 일에 대한 권태가 하늘에 닿을 만큼 커진 상태였다.. ‘이 일을 마치면 나는 어느 곳으로 취업할 수 있을까라는 대한민국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일반적인 걱정이 우선하고 있었고 영어를 배워 유창하게 말하고 싶은 갈망, 해외여행에 대한 로망까지 더해져 워킹홀리데이에 관한 관심은 급속히 증가하기 시작했다. 마침 친한 동료 비서 중에 호주 퍼스로 워킹홀리데이를 다녀온 언니가 있어 이것 저것 물어보았고, 언니의 대답은 한번쯤은 다녀와도 좋다.” 라는 말이었다.

23살을 꽃으로 비유하자면, 아직 꽃봉오리. 시간으로 비유하자면 7 15분 정도 밖에 되지 않는 젊디 젊은 나이에 많은 것을 경험하고 싶었다. 그렇게 고민은 점점 긍정적인 결정으로 굳혀졌고 가장 먼저 할 일은 부모님을 설득시키는 것이었다. 하나뿐인 딸을 머나먼 타지에 내보내는 일은 대부분의 부모들이 꺼려할 것이다. 물론 나도 그만큼은 예상했지만 가려거든 호적은 파고 가라고 말씀하실 정도의 완고한 입장을 아버지는 내게 비추셨다. 하지만 하고 싶은 것은 꼭 하고 마는 성격을 가진 내가 그것에 결코 뜻을 굽힐 리가 없었다.

결국 나는 상여금으로 받은 돈으로 비행기표를 바로 구입하고 티켓을 출력해 부모님께 보여드렸다. 그런 나의 행동에 아버지는 어이없어 하셨지만 끝내는 1년여의 호주생활을 알차게 보내고 좋은 추억을 많이 만들어오라며 내 뜻을 지지해 주셨다.

출국 하기 전에는 많은 준비가 필요했다. 아무래도 연고도 없는 나라에 혼자 가려니 많은 정보를 수집 해야 했고 지역선택의 갈등까지 있었다.

호주에 대한 정보를 얻기 위해 인터넷 검색을 했더니 호주 워킹홀리데이에 관한 카페가 많이 개설되어 있었고 그 중 나는 한곳에 가입하였다. 그 카페에서는 워킹홀리데이를 가려는 사람들을 위한 여러 가지 프로모션을 진행하고 있었는데, 그 중 하나인 비전유나이티드라는 한국 유학원에서 진행하고 있는 어학원+취업보장프로그램을 선택하게 되었다. 이런 프로모션으로 가게 될 경우 가장 매력적인 점은 국비지원을 받을 수 있다는 점이다. 해외에서 초기 정착시 외국어 교육으로 소모되는 비용을 많이 절감할 수 있고, 그 돈을 다른 필요한쪽에 쓸 수 있어 나처럼 넉넉하지 않은 자금으로 해외취업을 준비하는 사람들에게는 큰 도움이 된다.

나는 내 1년을 헛되이 보내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어떻게 하면 후회 없는 1년을 만들 수 있을까 고민하다 제일 먼저 계획을 세우기로 하였다. 핵심적인 목표를 큰 틀로, 그리고 그 안을 세부적인 것들로 채워나가게 되면 더없이 좋을 거라 생각하였다.

그 때 내가 스스로에게 던진 질문은 왜 가려고 하는가?” 였다. 이 질문은 내가 지인들에게 호주로 간다고 하니 많이들 내게 질문하신 내용이기도 하다. 가장 큰 목표는 이었다. 비자 이름이 워킹홀리데이이지 않은가. 호주는 한국보다 물가가 비싸다. 이 말인 즉 슨 급여도 한국보다 당연히 높다는 것이다.

나는 그 당시 자취를 하고 있었기 때문에, 1년 후 한국에 돌아 왔을 때는 그 때의 자취방보다 더 큰 곳으로 전세를 얻고 싶었다. 그래서 워홀러(워킹홀리데이 비자를 가진 사람을 가리키는 속칭)들이 호주에서 어떤 일을 하고 있는지 카페와 블로그를 통해 정보를 얻기 시작했다. 또한 현지 사이트의 구인구직란을 보면서 이런 직업도 있구나 알게 되었고 대략적인 시급은 어느 정도인지, 어떤 점을 유의하여야 되는지 등의 내용도 익혔다. 정말 다양한 직업이 있었지만 나의 두번째 목표는 외국어 습득이었기 때문에 외국어를 최대한 많이 쓸 수 있는 직업을 구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래서 나는 출국하기 전까지 회화학원을 다녔다. 현지에 도착하면 많은 어려움이 있을 거라 예상하였고 그것을 조금이라도 덜고 싶었기 때문이다.

인터넷을 통해 호주에 어떠한 직업이 있고, 어느 정도의 급여인지 등을 대략적으로 파악하고 난 뒤에는 어떤 직업을 사람들이 제일 선호하는지 찾아보기 시작했다.

대부분의 워홀러들은 시티에서 먼 농장으로 일을 하러 가지만 나는 피부가 타는 것이 싫고 벌레가 싫었기 때문에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내가 가장 중점으로 두었던 것은 우선 급여가 높을 것 ! 이었고 이외에는 시티주변일 것, 영어를 많이 쓰는 오지잡일 것 이었다. 급여가 높을려면 호주사람들이 꺼리는 직업이어야 했고 대부분 힘들거나 더러운 일인 것이 당연했다. 예를 들어 청소잡이라던가 공장일등이었다.

오피스에서 고상하게 앉아 컴퓨터나 두드리며 근무하던 내가 그 일을 잘 견뎌낼 수 있을까. 라는 고민을 안 해본 것은 아니다. 그렇지만 젊어서 무슨 고생을 못하겠냐는 생각이 우선이었고, 여담이지만 나중에 지내고 보니 돈이 가장 궁할 때 급여가 높고, 근무여건이 좋으면 다 하게 되더라는 것이다. 사람은 적응의 동물이니까.

나의 목표는 잉햄이라는 닭 공장을 들어가는 것이었는데, 이 공장은 한국인들이 가장 들어가고 싶어하는 공장이었다. 급여조건이 외국인들과 차별 없이 동등했고, 오히려 워킹홀리데이 비자를 가진 워커들은 캐쥬얼로 분류되어 급여의 20%가 더 붙어 꽤 높았다. 게다가 고기공장에 들어가려면 필수로 맞아야 하는 큐피버(질병을 막기 위한 독감주사의 일종으로 접종한 사람 중에 적은 확률이지만 불임 할 경우가 있다 하여 꺼려했었음)라는 주사도 닭 공장이기 때문에 맞지 않아도 되었기 때문에 나에게는 최고로 적합한 일터였다.

호주에 입국하여 어학원을 다니는 초기에 잉햄의 구인공고가 떠서 지원했지만 전화가 오지 않았다. 마음이 앞서 인터뷰까지 준비했으나 한국말로 하기도 힘든 인터뷰를 영어로 하자니 마땅히 할말이 떠오르질 않았고, 전화인터뷰에 통과할 자신도 없어 그냥 잊고 살았다. 지금 생각해보면 작성했던 지원서까지 엉망이라 전화를 받지 못했었던 것 같다. 전화를 기다리는 동안 호주 한인 구인구직사이트를 검색하여 겨우 베트남 레스토랑 파트타임잡을 구했지만 불행하게도 2주만에 일을 그만두어야만 했다. 영어를 너무 못해 손님들과의 의사소통에 어려움이 있었기 때문이다.

덕분에(?) 4개월 동안은 영어에만 매진할 수 있었고 장족의 발전이 있었다. 듣기, 쓰기, 말하기가 정확하지 않지만 되기 시작한 것이다.

학원이 끝날 무렵에는 구직을 위한 모든 준비를 마쳐야 했다. 한국에서 이미 5번이나 생활비를 송금했기 때문에 직업이 절실히 필요했다. 그때까지도 잉햄에 대한 미련의 끈은 놓지 못했다. 고민 끝에 처음 지원했을 때 자동메일로 답장을 받은 인사담당자 메일 주소로 무작정 메일을 보내야겠다고 생각했다. 혹시나 내 메일을 보지 않을까 라는 마음에서였다. 그때부터 이력서를 수정하고, 자기소개서의 일종인 커버레터를 써서 선생님의 검사를 받았다. 그리고 인터넷에 떠돌아다니는 잉햄 전화인터뷰와 실전인터뷰 질문에 대한 답을 나만의 생각으로 적어 선생님들의 검사를 받았다. 한 선생님에게만 너무 부탁하면 귀찮아 하실 것 같아 학원의 리셉션리스트, 다른 반 선생님 등 보이는 선생님은 모두 붙잡고 수정해달라고 부탁 드렸다. 그 다음에는 출력한 종이를 전화인터뷰가 올 때까지 가지고 다녔고 심지어 잘 때도 머리맡에 두고 잤다. 자는 도중에 전화가 오면 바로 보기 위해서였다. 물론 툭 치면 탁 하고 나올 정도로 답도 외운 상태였지만 만에 하나의 상황에서 발생하는 실수를 막기 위해서였다.

 지원하고 나서는 자주 다니던 유학원의 전단지 홍보일을 하면서 전화를 기다렸다. 전화를 기다리는 동안은 하루하루가 애가 탔고, 우울했다. 앞서 말했듯이 벌써 5번의 환전을 했고, 다른 직업들도 지원했지만 전화를 받지 못했기 때문이다. 한국에 돌아가야 하나 라는 생각까지 들었다. 포기하고 싶었지만 할 수 없었다. 이미 써버린 돈과 낭비한 시간이 아까웠기 때문이다. 그래서 집요하단 생각이 스스로 들 정도로 일주일에 한번씩 지원서의 제목과 내용을 바꾸어 인사담당자의 이메일로 계속적인 지원을 했고, 간절해서였을까? 지원한지 3주 만에 전화를 받았다.

그러나 큰 고비는 그때 일어났다. 지원자가 어느 정도 회사에 대해 알고 있는지, 그 전에는 어떤 일을 했는지의 평이한 수준의 인터뷰 질문이었는데도 잘 들리지 않아 애를 먹었다. 전화영어가 어렵다고는 익히 알고 있었지만 예상외로 너무 안 들리는데다가 긴장까지 더해져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녹음기처럼 자동으로 나올 정도로 외운 덕에 답은 정확하게 할 수 있었다.

마침내 그 다음날 아침 실전 인터뷰를 보러 올 수 있는지 전화말미에 인사담당자가 말하였고 다음날 실전인터뷰를 갔다. 1:1 인터뷰였고 팀워크란 뭐라고 생각하는지 본인의 업무가 밀릴 시에는 어떻게 대응할 것인지의 한국말로도 대답하기 어려운 꽤 수준 있는 질문들이 이어졌지만 만반의 준비를 하고 간 터라 당황하지 않았다. 질문을 완벽히 이해하진 못했지만 어느 정도 이것을 물어보는구나 파악하면서 자연스러운 분위기를 이끌어냈다. 덕분에 인터뷰에서 좋은 인상을 남길 수 있었다. 마치고 난 뒤에는 신체검사를 받았다. 오래 서서 일해야 하기 때문에 기본적인 체력이 중요하고 과거에 허리나 다리 쪽에 문제가 생겨 수술을 받은 경험이 있는지의 여부도 판단하기 위해서였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인터뷰에서 인덕션(일을 하기 전에 보통 그 회사에 대해서 소개를 하고 안전과 위생등의 교육을 받는자리)까지 많은 기간을 기다려야 했지만 나는 일사천리로 진행되어 화요일 날 전화인터뷰를 받고 금요일에 인덕션을 마쳐 그 다음주에 일을 할 수 있었다.

나는 현재 노동자들을 위한 노조가 있고 일을 시작할 때와 끝날 때 직원카드를 기계에 대면 정확한 급여가 나오며 인종차별이 공식적으로 규제 되어있는 정말 좋은 환경에서 일을 하고 있다.

각 노동자들은 정해진 레벨이 있고 레벨마다 채워야 할 정해진 시간이 있는데, 그 시간을 채우면 레벨 업을 할 수 있다. 그래서 지금은 500여 시간의 트레이닝기간을 끝내고 LEVEL 3인 상태이다. 때문에 처음 일을 시작할 때보다 시급이 올랐다. 수입도 꽤 만족해서 힘든 것도 참을만하다. 가끔은 파스를 붙이고 자야 할 때도 있지만 귀국 2개월을 앞둔 현재 후회는 하지 않는다. 지구 반대편으로 날아와 부모님 외 누구의 도움 없이 혼자 독립한 스스로가 자랑스럽고 대견스럽다.

가끔 나의 페이스북을 보고 혹은 주위에 얘기를 듣고 무작정 호주에 오고 싶다는 사람이 여럿 있다. 그 사람들에게 경험자로서 짧은 조언을 해주자면, 여기에는 우리가 바라는 로망은 없다. 여유롭고 한가로운 외국생활의 희미한 로망 따윈 과감히 버리고 와야 한다. 그리고 좀 더 치열하고 경쟁적으로 살아야 한다. 남들보다 열정적인 사람만이 좋은 결과를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힘들고 더러운 일이 싫고, 한국말을 쓰는 한인잡도 싫다면 네이티브들과 어려움 없이 대화를 나눌 영어실력 정도는 갖춰야 원하는 직업을 가질 수 있을 것이다. 아니면 서러움을 억누를 수 있는 인내심이라던가 정반대로 무한긍정의 마음가짐이 필요하다.

여기는 외국이고 보통의 워커들은 외국어 능력이 많이 부족하기 때문에 일을 하면서 무시당하는 일이 수도 없이 많다. 그러한 상황이 닥칠 때 마다 그만둘 수도 없으니 스스로가 단단해져야 한다. 힘들 때마다 어떤 것을 이루기 위해 여기에 왔는지 되새긴다면, 가끔씩 찾아오는 외로움과 슬럼프에 시간을 낭비하지 않고 잘 견딜 수 있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가슴 한 켠에 외국생활의 꿈을 간직하고 있다면 주저하지 말고 겪어 보라고 말해주고 싶다. 꿈을 가장한 호기심과 이유도 모르는 망설임을 곧바로 도전으로 승화시켜라. 그리고 끊임없이 노력하여 마지막엔 값진 결과물을 얻길 바란다. 그 결과물은 반드시 물질적인 것이 아니라 정신적인 측면의 깨달음도 좋다. 그것이 1년 뒤 한국에 돌아갔을 때 본인 스스로를 좀 더 움직이게 하는 에너지원이 될 수도 있으니까 말이다.

나는 아직 현재 나의 생활이 완벽히 만족스럽진 않다. 하지만 훗날, 나를 돌아봤을 때 후회하지 않기 위하여 부단히 노력하고 있다. 아침마다 졸린 눈을 비비며 오늘 일을 나가면 외국인 동료들과 나눌 대화 몇 개를 생각하고, 슈퍼바이저나 동료들의 말을 잘 알아듣기 위해 영어듣기 연습을 한다. 앞으로 남은 기간 동안은 이렇게 공부를 하고 마지막엔 여행을 하면서 끝을 잘 마무리 할 계획이다.

나에게 있어 2012년은 20대의 짜릿했던 용기와 도전이 함께했던 빛나는 한 해로 평생 기억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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